광주문화탐험

전고필 _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진흥팀장

어릴 적 동물원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고작 서너 번 광주로 가는 버스가 운행되는 시골, 하지만 신작로까지 나가는 데도 30분이나 걸어가야 하니 여간해서는 그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시간관념이 부족한지라 이런 버스가 정해진 일정대로 간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터였다. 다만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로, 점심 무렵 광주로 가는 버스가 있고 서방이라는 곳과 터미널에서 멈춘다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린이날이 되어 떼를 써 봤지만 바쁜 부모님에게 이것은 사치 그 자체였다.

어린 날 비밀스러운 일탈, 사직 동물원

해서 나는 공작이 아름다운 깃털을 뽐내고 백수의 제왕 사자가 갈기를 휘날리는 그런 사직동물원에 홀로 가기로 맘을 잡았다. 드디어 탈출, 혼자 동물원을 찾아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나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수난이 많았다. 시골 촌뜨기가 어리벙벙하게 길을 찾는 모습을 본 달건이 형들이 위압적인 모양새로 내가 가진 돈을 강탈해갔다. 다행히 그러리라 예측을 하고 따로 숨겨둔 돈이 있어 물어물어 동물원에 닿았다. 창살 아래 갇힌 동물과의 만남은 그렇게 나의 일탈로 시작하고 성공리에 마쳤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 기억에는 거기까지만 존재한다. 그때 보았던 동물들이 무엇이었는지 동물원의 모양새가 어떠했는지,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동물들을 바라보았는지 전혀 형상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나 혼자 몰래 감행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보고 들었어도 돌아와서는 입을 열면 안 되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으리라. 낚시꾼들은 자신이 잡은 고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서 30센티로 시작한 것이 2년이 지나면 50센티 정도로 자라는데, 괜시리 입을 열었다가는 그날의 거사가 온통 부풀려 허공을 타고 부모님의 귓속에 당도할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런 만행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을까? 그로부터 세월이 지나 친구를 하나 만났다. 우치동물원에서 수의사를 하는 최종욱이었다. 그 친구는 입심도 좋고 글발도 빼어난 데다 주량까지 세서 ‘세상에서 가장 불량한 동물원 이야기’를 비롯해 동물원에 관한 책만 여섯 권이나 쓴 그야말로 불광불급의 사나이였다.

흥미진진했던 수십 년만의 동물원 외출

해서 신록 푸른 5월, 지난 세월의 상처는 잊고 동물원에 갔다. 입장료 1,500원을 내고 상큼하게 들어서니 산의 비탈지에 자리하면서도 그다지 경사도가 높지 않은 곳에서 동물들이 나를 반겨준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넓은 동물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라오스에서 온 거대한 코끼리 무리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만 주는 관람의 대상이 아닌 직접 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주는 체험까지 가능한 순한 코끼리들이었다. 그들의 수고로움에 미안하여 길게 칼질을 한 오이와 당근을 사서 주려 했지만 코끼리를 조련하는 이들은 하지 말라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배가 부르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서 미안스럽게 그들만 수고롭게 하고 이미 사 놓은 먹이를 들고 위쪽으로 가니 아주 키 큰 거인 기린이 있었다. 워낙에 큰 키이지만 울타리 또한 높아서 목 언저리만 밖으로 삐져나왔다. 아이들은 대부분 아빠의 손에 들려서 맛있는 채소를 기린의 긴 혀에 말아주고 있었다. 이렇듯 각 동물들과의 만남은 그들의 먹잇감을 든 상황에서 더욱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다. 그중에는 꿈쩍하지 않는 동물들, 이를 테면 야행성 동물과 같은 경우는 아무리 우리가 부르더라도 흔들림이 없었다. 수의사의 설명을 듣고 안내판을 보면서 지나는 동물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했다.

홀로 남은 늑대의 서러움이나 토끼보다 몸집이 작은 원숭이가 토끼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사는 모습 안에서 느껴지는 정겨움이나 남극에만 있다는 그릇된 이해를 바꿔 놓은 희망봉 펭귄의 무리. 부엉이는 밤에 날아야 하기 때문에 풀섶에서 해를 무심히 지우고 있는 모습, 말똥가리가 나무 위에서 기민한 눈초리로 우리를 쏘아 보고 있는 모습, 캐나다기러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거위들의 뒤뚱거리는 몸짓 등 단지 보고 지나치는 대상으로서의 동물들이 아닌 그 자리에 있기에 얼마나 빛나는지 하는 속 깊은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동물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먹이는 무엇이고 생활습관들은 어떤지 꼬치꼬치 묻고 다녔다.

사직공원에서 우치동으로 40년 이어진 역사

내 기억 안에 다 저장하지 못했지만 동물원을 돌면서 아픔과 수난의 역사를 상기하게 하는 설명도 들었다. 우치동물원의 전신은 1971년 4월 사직동물원으로 시작되었다. 토지신과 곡신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에서 제사를 멈춘 것은 1894년의 일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겪고 6.25 전후 혼란을 겪으면서 사직단은 방치되어 지내다 냉전시 북한 평양 동물원보다 더 큰 동물원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엄명으로 서울대공원에 이어 두 번째로 동물원이 들어선 것이었다. 사직단의 흔적이 소멸되고 거기에 동물원이 들어서는 아이러니가 탄생한 것이다.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소중한 공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직단의 부활을 염원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1992년 5월 지금의 우치공원으로 동물원이 옮겨 오고 사직단은 그로부터 2년, 사직제가 명맥이 끊긴 지 100년 만인 1994년 복원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치동물원의 역사는 거슬러보면 40살이 넘는다. 그 깊은 연륜 만큼 동물원이 지닌 명성도 빼어나다. 무엇보다 야생동물들의 경이로운 작업인 출산에 있어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다. 사직공원에 있을 때부터 한 쌍의 벵골호랑이가 새끼를 많이 낳아 잘 길러 전국 모든 동물원에 분양을 해줘서 닉네임이 “호랑이 동물원”이라 불릴 정도였고, 이후 우치동물원의 시대가 되어서도 그 까다롭다는 침팬지의 출산도 이어졌고, 세계 토픽감이라는 코끼리의 순산까지 받아내서 ‘경이로운 다산의 산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현재 우치동물원에는 140종에 600여 두의 동물들이 깃들여 살고 있다. 저마다의 다른 서식 조건을 지니지만 이들을 보살피는 사육사와 수의사의 한결같은 애정 속에서 잘 자라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허파, 자연학습의 장으로 소중히

그렇게 선망했던 동물원을 찾아왔지만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흐른 탓에 그때의 설렘은 반감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라는 도시 안에 동물의 왕국이 또 하나의 허파역할을 하고 있음을 봤을 때 내게 또 다른 생각을 부여했다. 관광자원이 부재하다고 이구동성으로 광주를 말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이렇게 쾌적한 환경에서 경이로운 동물원이 존재하는 곳은 찾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공간의 입지와 동물들의 진한 생명력과 사육하는 이들의 정성을 세심하게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일 아닐까!

밖에서 보지도 않고 늘 거세된 자연이라고 말해왔던 동물원, 그 지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곳이다. 하지만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친구의 말을 빌자면 서식여건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멸종으로 치닫는 동물 종의 보전과 자연학습의 장으로 다시 한 번 돋움하기 위해 그들은 동물들과 함께 몸부림치고 있다고 했다.

한해 입장객 80만 명이 찾아오는 곳, 그 중 절반 이상인 무료 관람객은 유치원생부터 장애인 어르신들이라고 했다. 광주를 찾는 외국인들의 단골코스도 우치동물원이라고 한다. 그런 명소이면서도 공공재인 동물원에 경제성과 이윤창출에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참으로 무미한 일이다 싶어진다. 자연생태학습의 장으로 동물원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 창출과 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에 지원이 따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쉽게 돌아오는 길, 이렇게 소중한 공간을 봄날 한때 보내는 것으로 마감지어선 안되겠다 싶어졌다. 계절마다 색도 다르고 날씨 때마다 달라질 것인데 어찌 한번 둘러보고 동물들과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동물들의 먹이를 나름 준비해 볼까 생각한다. 오후 세시가 넘어야 활동을 시작한다는 호랑이를 위해 생닭 한 마리라도 사가지고 갈까. 아니면 이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는 인정 많은 사육사와 수의사를 위해 튀긴 통닭이라도 닭들 몰래 사가지고 갈까? 목하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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