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들이 만들어 내는 광주.전남 새바람
작성일2015-03-20
작성자 관 *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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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평- ‘을(乙)’들이 만들어 내는 광주·전남 새바람 |
서영진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지난 토요일 밤 서구 풍암동 호프집에서 광주의 예술인 등 몇 사람과 함께 술잔을 나눴다. ‘골든타임’을 맞은 광주를 문화예술측면에선 어떻게 나서야 할까 등을 놓고 갑론을박했다. 해답은 엉뚱하게도 그 호프집 주방문턱에 걸린 나무판에 있었다. 거기엔 1천원, 1만 원짜리 지폐 여러 장이 핀에 찍혀 나풀거리고 있었다. ‘장애우 돕기를 위한 성금 모금판(板)’이었다.
여주인은 호프집을 어렵게 운영하면서도 불우이웃을 꾸준히 돕고, 이를 알게 된 손님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금상자나 유리어항이 아닌 게시판에 돈을 ‘게시’하도록 한 발상도 재밌지만, 누구나 쉽게 돈을 떼어 갈 수 있는 방치상태인데도 돈을 핀으로 눌러 붙이고 가는 손님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주인을 믿고 돈을 기부하는 것이 80년 5월광주의 시민정신을 생각나게 했다. 감동이다.
서민들의 이웃사랑, 지역사랑-인간애를 살려가는 모습이 늘고 있음은 분명 희망이다. 광주문화재단은 무등산 밑 전통문화관에서 남성 은퇴자와 실버세대를 위한 음식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박인화 전 광주시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프로그램을 칭찬하며 전통문화관을 활성화시키는데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 후 일부 참여자들이 함께 모임을 만들어 그곳에서 배운 음식솜씨를 살려 불우시설을 찾아 음식봉사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날짜와 장소까지 결정했다니 벌써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5기째 발족한 ‘광주문화예술탐험대’의 움직임도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광주를 이해하고 새롭게 바꾸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매주 직접 명소를 찾아 눈으로 확인하고, 보존과 발전방안을 찾는 활동은 흩어진 구슬을 모아 꿰는 작업인 셈이다. 지금은 말보다 실천이 필요한 시기이고 직접 행동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는 것은 불빛이다.
거칠어진 자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처럼 인본주의로 되돌아가려는 모습은 새로운 저항운동이다. ‘땅콩회항’사건 이후 ‘갑(甲)의 시대’는 몰락하고 을(乙)들이 주도하는 시대개혁의 방법은 다양해지고 있다. 그동안 갑들이 ‘입’으로만 사회를 이끌어 왔다면, 을들은 ‘행동과 실천’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목요일 고흥군에서 ‘문화창의시대의 지역활성화’를 주제로 강의했다. 공무원과 기관장, 주민대표 등이 모여 고흥의 미래를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자체마다 인문학 강좌 붐이 일고 있는 가운데 박병종 군수의 아이디어로 개설한 이 프로그램은 김황식 전 총리(1월), 유우익 전 통일부장관(2월)에 이은 것이었다. 참석한 주민들은 지역개발에 대한 관심과 고향사랑정신이 뜨거웠다.
박 군수와 고흥군 주민들은 지역활성화 기법중의 하나인 ‘넘버원(Number One)’과 ‘온리원(Only One)’에서 온리원을 강조하며 ‘하나뿐인 고흥’을 추구하고 있었다. 고흥군엔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시설이 있다. 나로우주센터다. 앞으로도 이 기록은 계속 유지될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또 ‘한국설화(說話)문학관’을 건립중이다. 이 또한 국내 유일의 시설이 될 전망이다. 고흥군은 천연의 경관과 따뜻하고 청정한 기후풍토, 역사와 인심도 남다르다.
문화창의시대인 21세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려면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일들과 맞부딪쳐야 할 경우가 많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겪는 당연한 문제다. 과거엔 앞서가는 기업이나 단체, 국가를 뒤따라가며 조금 변형시킨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해도 됐지만 이젠 그러한 전략으로는 선두에 설 수 없다.
최근 일본 후쿠오카의 젊은 오케스트라지휘자가 찾아왔다. 광주·전남의 예술인과 교류공연 등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쪽에선 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중국도 광주·전남과 문화교류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지역 리더들의 관심과 대처는 미지근하다.
오는 4월 국회의원 재보선과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민심이 참다운 지도자를 찾기 시작하고 있다. 지연·학연·혈연중심의 ‘온정주의’는 퇴색하고 ‘새 인물’을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다. 농협조합장 선거에서 현역당선률이 56%에 그친 것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된다. 스스로 실천하는 ‘을’들이 말만 앞세우고 분란을 일으키는 ‘갑’을 가려내는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봐도 좋다.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경제계는 물론 시민단체까지도 ‘을’들이 만들어 내는 변화의 물결을 주시하고 함께 해야 할 때다.
<2015. 03. 17.(화) 무등일보 - 아침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