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를 말해봐

1963년 12월 4일생. 같은 날 태어난 동갑내기, 광주 민중예술계의 대표적 인물인 민중가요 작곡가이자 가수, 기획자인 박종화 씨와 한국화가 허달용 씨가 만났다. 치열하게 시대를 고민하며 현장에서 문화예술활동을 펼쳐온 두 사람이 광주와 5․18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내가 아는 허달용, 내가 아는 박종화

박종화(이하 박) : 전남대를 같이 다녔지만 학교 다닐 땐 서로 몰랐다. 내가 신방과 82학번인데 2000년 8월에 졸업했다. 허달용은 학교 다닐 때는 운동이고, 그림이고 안 했던 사람이다. 술만 먹고 다녔지.(웃음) 내가 출소한 98년부터 알고 지냈는데 어느 사이엔가 사회 속에서 빈칸을 메워주는 달용이가 되어 있더라. 남들 다 빠져나갈 때, 이념도 뭣도 다 없어져 갈 때, 옆에 달용이가 있더라. 뗄 수 없는 애증관계, 동지, 형제 같은 사람이다. 달용이의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믿음은 있다. 포기하지 않고 민중과 함께 해나갈 것이라는 거. 조금씩 바꾸어 가면서, 늦게 시작했으면서도 계속.

허달용(이하 허) : 종화는 첫인상이 노숙자였다.(웃음) 처음 봤을 때 출소한 지 얼마 안 돼 머리 산발하고, 찢어진 청바지 입고, 날 새서 술 마신 그런 분위기였다. 학교 다닐 때 ‘지리산’ 같은 노래는 알았지만 작사 작곡은 누가 했는지 몰랐다. 같이 술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선배는 선배구나 싶더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문화 예술을 통해 운동을 한다. 가끔 찔러주는 이야기들이 소중하다. 그런데 종화가 노래는 좀 못하는 것 같다. 노래는 하지 말라고, 작사작곡만 하라고 얘기해 왔는데 최근에 앨범 낸 걸 듣고 다시 노래하라고 했다. 노래를 잘 하게 됐더라.(웃음)

박 : 원래 잘했다니까. 노래는 한다고 느는 것이 아니다.

허 : 내가 듣기에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할걸.(웃음) 종화가 2001년에 평양 갔다 와서 감옥생활하고 7년 전에 함평에 들어갔다. 최근에 독집신보도 내고 그동안 서예전 두 번, 산문집도 냈다. 자기변화와 자기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존경심도 생긴다. 둘이 만나면 싸우고 욕만 하는데, 인터뷰 한다니까 칭찬이 나오네. (웃음)

박 : 최근에 신보 ‘지금’을 냈다. 12년 만에 낸 독집이다. 요즘엔 음악하고 서예하고 시 작업 하면서 함평 산속 작업실에 혼자 산다.

허 : 나는 작년까지 민예총 회장 하다가 그만 뒀다. 내년에는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올해는 그림에 전념해서 내년 봄에 전시를 하려고 생각 중이다.

민중 그리고 예술, 나의 정체성

박 : 내 정체성은 민중이다. 나는 민중가요, 반미주의자 이런 말 싫어한다. 그런 건 사회에서 만든 거다. 나는 그냥 민중이다. 그 안에서 살다 그 안에서 죽을 거다. 나는 노래 만들고 시 쓰고, 그것 밖에 재주가 없으니까 그렇게 살았다. 그 재주로 출세하고 돈 벌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단 1%도 ‘박종화가 변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내가 ‘갈 길은 간다’는 가사를 썼는데, 어디를 가겠는가. 지금도 비정규직은 500만이 넘고, 종태 같은 노동자가 자살하는, 그런 세상이다.

허 : 글쎄, 운명이라고 할까. 미술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졸업할 때가 포스트모더니즘이 판을 치던 때였다. 구상주의를 그리고 싶어서 ‘광미공(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에 들어갔다. 거기서 배운 게 많다. 97년부터 사무국장, 회장을 거쳐 시민운동도 2년 했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싫어하는 일도 ‘그럼 내가 하지 뭐’ 하고 맡아서 하다 보니 사람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림 그려야 할 시간에 허송세월했다고 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박 : 근데 달용이는 그림을 진짜 많이 그렸다. 운동 한다고 많이 못 그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개인전을 여덟 번이나 했으니까. 그리고 그림이 진짜 많이 늘었다. 나는 26살 이후로 노래가 안 늘었는데, 이 친구는 그릴 때마다 는다. 우직함과 성실함이 있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다음날은 깨끗하게 나온다. 최근에 그린 그림이 나를 감동시키더라. 의재 허백련 집안이라는 이유로 젊었을 때도 그림 한 장에 수백만원씩 받아서 그때는 미웠다. 이제는 1000만원씩 받는다 해도 인정한다. 그만큼 감동받았다.

광주에서 민중예술가로 살아가기

박 : 점수로 치면 빵점이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험난한 시절을 넘어왔다. 우리 앞에서는 국회의원들도 다 인사를 하지만 그럼 뭐하나. 민중을 팔아 자기 이익 챙기고 예술가들에게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 민예총 부회장을 맡았다. 아무것도 안 맡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다. 나의 기본은 예술가고 그보다 큰 게 민중이다. 그래도 광주에서 민중예술가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고 행복한 건 80년 5월의 기억 때문이다. 그때 고등학교 2학년, 칼빈 총도 들어 보았다. 그 5월이 내가 광주에서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한다. 그때 일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허 : 광주에서 민중음악을 하든 민중미술을 하든 5·18을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본다. 또 그것 때문에 계속 해오는 거고.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살아남은 죄인들, 그런 애절함 때문에 더 열심히 해온 거라는 게 맞고. 미술대학에 갔지만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안 꿨다. 그림을 통해 뭘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허씨 집안이라는 거대한 산이 있어서 그림을 해도 가려질 거니까, 그래서 대학 때는 그림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다. 그림을 그리려고 민중예술판에 들어갔지만, 결국 내 뿌리가 광주, 5·18이어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 달용이는 허씨 집안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을 것이다. 5대를 이어온 화가 집안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여기 와 있다. 기득권이 있는데.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미스터리다.

허 : 5·18이 나를 그림 그리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림으로 봉사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을 이야기하고, 그들 안에 살면서. 예술 하는 사람들은 그림, 시, 음악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5·18이 아니었다면 다른 뭘 할 수도 있었겠지만, 광주에서 태어나 5·18을 겪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광주는 진보적이면서 대단히 보수적인 도시다. 회화만 하더라도 오지호 같은 큰 산이 있어 다양성이 존재하기도 힘들었고 비엔날레 전만 해도 현대미술 하는 사람들은 알거지나 다름 없었다. 민중예술 뿐 아니라 예술인으로 살기 힘든 곳이다. 그런 걸 바꿔가겠다는 게 우리 목표다.

나는 여전히 ‘전사’이고 싶다

박 : 음치 작곡가, 혁명가 등 나를 부르는 많은 호칭이 있었다. 그런데 음치 란 말은 정말 싫다. 나 노래 잘하는데. 사회가 원하는 노래를 안 해서 그렇지. 솔직히 이쁘게 노래는 안 한다. 할 수는 있다. 연습하면.

허 : 이제 가수니까 연습해야지.

박 : 그런가. 그 많은 호칭 중에 20대 때 들었던 ‘전사 박종화’, 그 말을 듣고 싶다. ‘전사’. 나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싸우는 ‘전사’다. 단결하면 이미 끝났을 싸움을, 역량이 분산되니까 싸움이 안 되고 계속 진다. 90년대 초반에 우리가 뭉쳤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정치하고 싶어서, 편히 살고 싶어서, 인사하고 예절바르고 타협하고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

허 : 민예총일 하면서 개인전을 5번 했다. 그러면서 화가로서의 자신도 붙었다. 그 사이 광우병쇠고기수입반대대책위 집행위원장도 맡고, FTA 반대시위도 도왔다. 어디 가서 화가라고 말하기 쑥스러웠는데 이젠 자연스럽다. 화가도, 문화예술활동가도 둘 다 마음에 들지만 이제는 화백에 집중해서 살아보고 싶다. 내가 살 곳이 내 작업실, 그림판이라는 것을 꾸준히 느껴왔다. 민예총 회장도 그만뒀고, 이젠 더 열심히 작업현장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다. 앞으로 나서진 않겠지만 뒤에서 항상 투쟁을 지켜보면서 작업도 해야 되겠다.

정작 광주에 5·18이 없어

박 : 굳이 대답하자면 5.18기록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된다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진짜 소중한 거다. 유네스코의 영향력만큼 광주를 빛나게 하고 세계로 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허 : 기록물이 등재된 건 좋은데, 가슴 아픈 게 뭐냐면 이스라엘에 기독교가 없고, 인도에 불교가 없는 것처럼 5·18이 태어난 광주에 5·18이 없다는 거다. 도청도 없애려고 했고. 광주 전체가 5·18유산이다. 유산을 창고에 쌓아 두려 하지 말고 5월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5·18이 아픔만은 아니다. 혁명이고, 함께 만든 ‘대동세상’이었다. 광주 어디를 가든 그런 걸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도청 내부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디지털은 잠깐인데 다 디지털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아날로그로 만들 것인가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할까, 시민과 관이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저 축하하고 파티로 끝내면 안 된다.

박 : 광주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공동체'다. 그해 5월, 그 힘든 기간에도 범죄사건이 단 한건도 없었다. 10일간.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냉장고, TV 없는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 가져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더불어 살아가면 0점이 100점이 될 수 있다. 진보 안의 보수가 보수 안의 보수보다 더 무섭다. 광주는 광주답게 살아야 한다. 그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예의이고, 의리이다.

허 : 광주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박정희 때부터 지금까지 야당이 없었다. 김대중 이후로 당만 달고 오면 당선이 되는 거다. 광주에 오면 경쟁심리가 없는 거다. 그러니 정치로 줄을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운동 한답시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 광주 안에서는 보수 꼴통들하고 논다. 문화예술계도 광주에 오면 정체성이 없어지고, 서울에 가면 정체성이 생기고. 그게 문제다. 광주가 달라져야 한다.

박 : 문화재단도 마찬가지다. 재단이 왜 생겼나. 누구를 위해 생겼나. 매번 다양한 시각과 사람들을 모아 광주를 위한 새로운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실은 인터뷰 연락 받고 별로 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재단이 담고 있는 건 요만큼인데, 겉으로만 이만큼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너무 거부하는 것도 그런 것 같고 또 달용이랑 한다고 해서 한다고 했다. 날이면 날마다 광주문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라. 문화나무도 그래야 커지는 거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광주다운가, 아닌가’로 결정하면 된다.

허 : 내가 재단 자문위원이다. 훌륭한 자문위원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같이 고민하면서 일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국비나 시비를 집행하는 이전 문진위랑 다를 게 없어진다. 또 시와의 관계에서도 독립적이지 못한 것 같고 아직도 시에서 관여하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참 안타깝다.

박 :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공식 이름에 문화가 들어가잖아. 나랏돈을 받더라도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해야지. 광주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항상 생각하고.

허 : 아무리 나랏돈을 받더라도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것이 5·18 행사다. 나랏돈 받으면서 나라 욕을 한다. 시민이 주도하는 행사는 전국에 광주밖에 없을 거다. 작년에 관이 주도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안 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지 않나.

박 : 올해 31주년 행사에서도 위기감이 들긴 했다. 이러다 5·18이 없어질 것 같다는. 유네스코 등재 보고행사 하면서 합창단을 불렀다고 들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누구나, 노래 못 부르는 사람도 좋고, 그렇게 모두가 부르는 거다. 그게 더 감동이거든. 바로 민중성. 그걸 왜 모르냐고.

박종화는 그가 만든 노래처럼 산다. 부조리한 것들에 맞서 ‘투쟁의 한 길로’ 달려왔고,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다 20대와 30대의 마지막을 감옥에서 지냈다. 지금도 타협 없이 노래로 글로 ‘갈 길은 간다’.

허달용은 그림과 실천의 조화를 늘상 고민하며 촛불시위, 노무현, 4대강 등 사회의식이 강한 작품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려왔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주다운’ 문화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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