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문화탐험

곽규호 _ 광주문화재단 홍보교류팀장

가느다란 조명마저 꺼져버린 충장로의 음악실에서 비발디의 ‘사계’,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 같은 음악들을 처음 들은 게 고교생 시절이다. 음악회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촌놈에게 다가온 그 이국적이고 낯선 환경이 싫지는 않았던 것은 그 어둠과 음악의 조화가 맘에 들어서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이름 하여 고전음악감상반이다. 당시의 절친을 따라 찾아간 학생회관 4층의 넓은 음악실. 역시 커튼으로 빛을 차단하고 조그만 칠판엔 독일어로 된 음악 제목 등이 씌어 있었다. 그렇게 음악을 조금씩 조금씩 좋아하게 됐다. 그 시절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음악이라야 고작 소형트랜지스터라디오나 마이마이 같은 걸로 듣던 내게, 기계도 없고 음반도 없는 형편으로는 즐길 수 없었던 음악을 맘껏 감상할 수 있단 점이 좋았다. 물론 동아리의 예쁜 여학생들이 내 발길을 잡아끌었던 점도 부인하지 않으리라.

1980년대 충장로엔 몇 개의 고전음악 감상실이나 클래식을 틀어주는 음악다실 같은 공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이 충장로 1가의 ‘베토벤’이다. 두 분의 누이 같은 분들이 매일 번갈아가며 음악실을 지켰는데 그 고아한 매력이 음악만큼 멋있었다. 베토벤은 여전히 그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데 몸이 좋지 않아 한 분이 떠나고 다른 한 분이 매일 거기서 우릴 기다린다. 30년 이 넘는 동안 이곳 ‘베토벤’에서 숱한 클래식 마니아들이 음악에 취했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눴다.

대학시절엔 매주 금요일 음악감상회가 열렸고, 이곳을 근거지로 한 빛고을음악감상회 같은 모임이 개최됐다.

베토벤이 수년 전 경영난으로 존폐위기에 몰렸다. 많은 이들이 추억의 공간이자 문화사랑방이 사라질까 안타까워했다. 다행히 ‘베토벤’을 사랑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기사회생한 바 있으나, 여전히 지난 30여 년 동안 베토벤음악감상실에 자리가 없어 발길을 되돌린 적은 없었다. 상업의 중심인 충장로 한 복판에 자리한 한산한 음악감상실, 문화도시의 현실인 듯도 하다.

그런데 광주시청이 서구 치평동으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시로서는 전국적 수준의 최고급 오디오를 갖춘 음악감상 공간이 들어섰다. 상무지구의 중심 거리에 자리한 ‘한울림’이다. 건물주가 만들었다는 5층의 이 음악카페는 술과 차도 마실 수 있어 베토벤과는 다른 맛을 준다. 감상실 내부에 고급 소파를 놔 두고 지극히 편안한 자세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했다. CD는 물론 LP판까지 수천장의 음원은 방송국 못지않은 수준이다. 카페공간에 설치된 모니터스피커마저도 어지간한 감상실에서 만나기 힘든 고급 제품. 오디오마니아들 사이에서 명품으로 꼽히는 앰프와 스피커가 편안한 음악을 뽑아 준다.

지난 4월엔 비교적 문화적으로 보면 귀빠진 곳이라 할 학동삼거리 언저리에 또 고급오디오가 있는 음악감상실이 생겼다. 감상의자가 나무로 된 게 재밌다. 음악을 듣는 순간은 마치 교회나 성당의 예배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따로 카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오롯이 음악만을 듣기 위해, 음악이 있는 영상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의 이름은 ‘다락’이다. 학원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김명선 선생이 사재를 다 털어 만들었다는 이 공간 또한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특히 김 선생이 직접 작품에 대해 친절하고 정감 있는 해설을 맡아 이미 팬들을 확보했다. 문을 연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학동 인근에서는 자랑할 만한 명소가 되었으니 클래식음악 감상공간에 대한 시민들의 갈증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한다.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삶에 주어지는 여백인 듯하다. 긴 시간이 아니어도, 명곡이나 명 연주자의 그것이 아니어도 감상에 빠진 그 시간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음악의 깊이에 빠질 수도 있고 생의 한 가운데 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기계음을 공연장에서의 라이브 연주와 비교할 순 없겠으나 불가에서 말하는 ‘참 나’를 찾는 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본다. 그래서 혹간 스님들이 좋은 음반, 명기로 꼽히는 오디오를 갖고 계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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