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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석 _ 광주문화관광탐험대․함평나산고등학교 교사
봄날이면 사람들은 동한다. 날이 부르고, 가족이 원하고, 그래서 차가 향하는 곳은 광주를 벗어난 인근의 축제장이다. 발 디딜 틈도 없건만. 옛날 화려하던 진흥원 벚꽃이나 광주공원, 사직공원의 동물원이나 꽃구경은 추억과 함께 사는 모양이다.
어느 사이 우리 기억엔 광주공원이 나이 드신 어른들만이 찾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간간히 찾던 입구의 국밥집도 사라져 버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의 발길은 더욱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되어 버렸다. 광주의 공원 1호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 오늘 찬찬히 돌며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만나보자.
공원을 돌기 전에 땅 이야기로 준비 운동을 해보자. 옛 사람들은 땅의 생김과 자신의 바람을 통하게 하여 풍수라는 것을 만들었나 보다.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옛 이야기를 찾을라치면 어른들 말씀 시작은 이곳이 무슨 명당이니, 산이 생김이 뭘 닮았느니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광주의 이곳도 위의 사직공원에서부터 아래의 발산까지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광주천 건너 양림산부터 성거산을 지나 발산까지의 광주 땅 생김새를 살짝 훑어보자.
어머니 품 같은 무등산의 한 팔은 너릿재를 지나 분적산을 거쳐 양림산(사직공원 일대)을 통해 광주공원(성거산)을 이어 발산까지 뻗었다. 일명하여 좌청룡이다. 다른 한 팔은 원효사의 화암봉과 지산동 뒤 꾀재를 돌아 장원봉, 중군봉으로 뻗은 것으로 이 지형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에 오르려는 ‘화룡승천’의 형국으로 우백호가 된다. 또는 이 줄기가 뱀의 형국이라서 예전에 지산동은 편방 혹은 붉은 뱀골(단사동)로 불렸다. 이 뱀은 시간이 지나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는 용이 되는데 이때 물의 역할을 했던 곳이 경양방죽(태봉산의 흙으로 메워진 계림동 광주시청 자리)이었다.
그 좌청룡의 한 맥에 1913년 광주번영회의 노력으로 처음 공원으로 지정되었다는 광주공원이 자리한다. 원래 명칭은 이 일대가 거북이를 닮은 땅 모양이라 구동공원이라고 했다. 공원을 만든 일제는 번영회도 그 성격이 문제가 있었지만 “신개척지” 광주 중심지를 내려다보면서 식민지 도시의 장래를 꿈꾸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일제는 식민지 통치의 방편으로 이곳에 공원을 만들고 신사를 만들었다. 광주서 목포로 가는 신작로 큰 길 가에 자신들의 지배의 위용을 보이는 탑과 함께 말이다. 이렇게 해서 당시 민둥산이던 성거산에 광주 도시공원 1호가 탄생하게 된다.
오늘 나는 봄꽃이 날리는데도 너무나 한적한 공원을 찾아간다. 많던 국밥집은 헐리고 주차장과 공원 정비를 하다만 흔적들 사이 공원 앞 주차장에 서면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해태 동상을 만나게 된다. 과거 야구와 함께 기억되는 기업의 홍보 효과와 함께 그 본래 상징적 의미가 큰 상이다. 해태(해치)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고 행복과 좋은 일을 가져다준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옳지 않은 사람을 골라 뿔로 받아버린다고 하니 요사이 우리 세상에 꼭 필요한 동물이다 싶다.
이제 발을 옮겨 보자. 현재 광주문화재단(옛 실내체육관, 일명 구동체육관) 왼편 길로 들어선다. 광주공원의 땅 생김이 거북 모양이라면 오른쪽 앞발에 해당하는 곳이 그 시작인 셈이다. 조금 오르면 성거사5층석탑(일반적으로 서5층석탑이라고 한다. 보물 제 109호)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징적인 것은 1층 몸돌이 2개의 단을 이루고 아랫단을 4개의 돌로 짜 맞추어 총 5개의 돌로 조합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양식으로 탑이 만들어진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1961년 해체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과 사리장엄구가 나왔는데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이 서 있는 곳이 거북이 목에 해당하는데 광주의 좋은 기운이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탑의 왼쪽으로 난 길을 가면 조그만 언덕이 있고 그 앞으로 머리를 하늘로 치켜 든 돌이 보이는데 이 부분이 거북 머리라고 하는 곳이다. 공원을 만들 당시 일제는 이곳에 남한대토벌 작전(일제에 저항하던 호남지역의 의병을 무지하게 진압했던 작전) 때 목숨을 잃은 전몰자 및 병사자를 위한 충혼비를 세웠다. 해방 후 헐고 해방기념탑을 세웠다가 안중근의사기념탑(지금 그 자리에는 없다. 아마도 중외공원 미술관 옆으로 옮긴 듯하다.)이 있었다. 광주는 거북이 보는 쪽이 발전한다고 하는데 북쪽을 보고 있다. 지금은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당시는 저 멀리 유림숲까지도 잘 보였을 듯하다. 일제뿐 아니라 1982년 종합체육회관을 지으면서 거북의 머리 쪽이 많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다시 거북머리에서 목을 거쳐 왼쪽 앞발 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내려오면 탑 앞에서 왼쪽 앞으로 심남일의병장 비석이 서 있다. 1907년 이후 전남 지역에 의병 항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절, 함평의 의기 높은 한 사내가 호남 제일의 의병장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수택’이라는 이름을 ‘남일’로 바꾸고 싸우다 의병 해산을 명령한 고종의 조칙이 내려지자 억울함을 눌러 참으며 의병을 해산하고 능주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국한다. 일제는 ‘현재 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라고 부를 정도로 일제를 괴롭히고 대규모로 싸웠던 의병 부대를 이끈 의병장이었다.
다시 담소 몇 마디 나누면서 몇 발짝 더 오르면 광주의 대표적인 시인 용아 박용철, 가장 전라도 말을 잘 사용했던 영랑 김윤식 두 사람의 시비가 서있다. 고향은 달라도 ‘시문학’ 동인으로 함께 교류하였던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 비로도 함께하는 모양이다. 어느 가수의 노래에도 이용되었던 용아의 시, 광주 송정리에 생가도 있는 그와, ‘오메’, ‘장광’ 같은 토속의 말을 가장 멋지게 사용했던 ‘모란’의 사나이 영랑은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책 한 장을 다시 추억하게 한다.
옛 관덕정(전주최씨 화수회관)자리 인근의 거북의 왼쪽 앞발을 지나치지만 집들이 들어서서 이제 그 구릉의 흔적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 길을 돌아 다시 아래로 돌아 내려가면 향교가 보이는데 거북의 왼쪽 뒷발 쪽이란다. 그리고 반대편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타나는데 이 공원에서 가장 중심적인 곳이란 느낌이 든다. 광장엔 우뚝한 탑, 현충탑이 솟아 있고 왼쪽엔 2002년에 건립된 위패보관소가 있다. 현충탑을 돌아보고 가운데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왼쪽에는 시민회관이, 오른쪽에는 무진회관이 보이고,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는 초입에 4·19문화원이 보인다.
1971년에 세워진 시민회관은 공연장 커튼인지 악기의 현인지 잘 모르겠지만 외관의 장식과 함께 문화 관람 시설이 없던 시절 광주 사람들의 중요한 문화생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남도예술회관과 함께 방학 때가 되면 만화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던 곳이다. 1979년 세워진 무진회관은 외관에 한국전쟁(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의 국기가 표현된 외관과 함께 반공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향교에서 공원광장으로 올라오는 길 오른편에 조그만 어린이 공원이 있다. 거북의 오른쪽 뒷발에 해당하는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전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지방금융조합(지금의 농협)터다. 또 이곳과 지금은 철거되고 없어진 아래의 성림교회 일대가 향교의 사마재(과거에 1차 합격했던 생원과 진사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곳) 자리로 이곳에서 근대 광주의 보통교육이 시작된 곳이다. 1896년 관찰부 공립 소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06년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석초등학교)가 그것이다.
또 과거 이곳 성림교회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마지막 도청에서 사망한 유동운 열사의 집이다. 목사의 아들로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는 일기를 남기고 5월 27일 도청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 이곳은 그를 기억하는 작은 비 하나만 남고 교회 자리를 비롯한 인근은 광주공원 희경루 복원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 공원 입구에도 시민군들이 곳곳에서 내가 아닌 우리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가져온 무기를 가지고 사격 연습을 했던 곳을 기억하려는 기념비가 서 있다. 우리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마다 공원 비둘기가 애처로운 마음에 감싸고 있는 듯하다.
1940년 신사를 개수할 당시 한국의 각 지방은 물론 몽골, 만주, 대만 남태평양 등의 아시아 여러 곳에서 많은 나무를 옮겨 심어 광주지방에서 가장 많은 수종과 희귀 나무가 밀집하여 식물원을 방불케 했던 공원은 해방 후 혼란기에 도벌 등으로 황폐화되어 옛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새로운 도시계획과 문화시설이 생겨나면서 어린 친구들마저 이곳을 찾지 않아 나이 드신 어른들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광주공원의 옛 기억을 더듬다 보니 글이 딱딱해져 버렸다. 그래도 혹 이 글을 읽고 공원의 이야기를 담으려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아보길 권한다. 도시의 속도에서 잠시 멈춰 늙음을 존중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광주향교와 비석거리, 석서정과 공원 앞 장터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겨야겠다.
편백나무를 살포시 가슴에 안아보자. ‘쿵 .......’하고 수분이 나뭇가지 끝까지 전달되는 박동이 느껴질 것이다.
편백나무의 박동소리를 실제로 듣고 싶다면 청 진기를 가져가 볼 일이다.
조용히 온숨을 내쉬다보면 편백나무가 부피생장하는 소리가 느껴진다.
쿵쿵쿵 쿵쿵 쩍!
의재 허백련 선생이 농업고등기술 학교를 운영하면서 실습용 축사로 지었던 문향정(미술관쉼터). 지금은 의재 선생의 말씀을 본받아 차도 마시고 차 문화도 배 울 수 있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춘설차로 의재 허백련 선생의 삶 과 예술의 향기에 다가선다.
Tip. 의재 허백련 선생은 의재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만나 볼 수 있다. 의재 선생의 더 많은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면 차공장, 춘설헌, 문향정, 의재미술관, 춘설차밭(삼애다원)에 들러보라. ‘삼애다원’에서는 평일(화~금) 오후 2시~5시,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 직접 차 잎을 따고 덖어 춘설차를 만드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지난 3월 19일 무등산풍경소리에 노래손님으로 초 청된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살레시오수녀회 ‘마인’의 공 연 모습.
Tip. <무등산풍경소리>는 매월 무등산 증심사 문화광장에서 열리는 산사음악회다. 일정을 확인해 숲해설가와 함께 무등산을 둘러보며 다양한 생명들의 이름도 알고 그들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의 하모니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