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리포트

정상필 _ <메종 드 아티스트> 저자․전 광주일보 기자

지난 4월 20일 오후, 파리 중심부 3구(區)에 위치한 19세기 풍의 번듯한 건물로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건물 앞 계단은 금세 이들이 타고 온 자전거가 차지했다. 매주 수요일은 프랑스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날인데, 그렇다면 이곳은 영화관인가? 영화관 앞에 떼를 지어 있는 젊은 파리지앵의 모습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건물의 어디에도 극장(Cinéma)이라는 단어는 없다. 건물의 위쪽에 조그맣게 극장(Théâtre)이라는 단어는 있다. 쾌활한 극장(Théâtre Gaîté). 쾌활한 극장 앞의 쾌활한 젊은이들이라. 이들과 함께 19세기 극장 안으로 들어가보자.

밖에서 보았던 건물의 고풍스러움은 로비까지다. 이태리식 오페라 극장처럼 좌우 양쪽으로 뻗은 계단을 지나쳐 로비를 통과하면 여기저기 내걸린 모니터와 세련된 인테리어 등 초현대식 분위기가, “밖에서 봤던 그 건물 맞나?”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여기는 디지털 혁명의 무대가 펼쳐지는 19세기 극장, 개떼 리릭(Gaîté Lyrique·‘서정적 쾌활함’이라는 뜻)이다. 이날 모인 이들은 디지털 복합문화공간인 이곳에서 개장 이후 열리는 첫 전시회를 보러 왔다. 영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그룹 매트 파이크와 친구들(Matt Pyke & Freinds)이 선보인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수퍼-컴퓨터-로맨틱(SUPER-COMPUTER-ROMANTICS)’이다.

오페라 극장에서 디지털 복합문화공간으로

지난 3월2일 개장한 ‘개떼 리릭’은 1862년 설립된 오페라 극장을 리모델링했다. 설립 당시 극장의 이름은 지금도 건물의 외벽에 새겨진 ‘쾌활한 극장’이었다. 극장의 기원은 현재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18세기 중반 오페라 배우이던 장-밥티스트 니콜레(Jean-Baptiste Nicolet)가 문을 연 ‘니콜레 극장’이다. 니콜레는 주로 희극 오페라를 공연해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1792년 극장의 이름은 ‘쾌활한 극장’으로 바뀌었고, 1862년 지금의 건물을 새롭게 지어 입주했다. 루브르 궁에서 가까운 오페라 그르니에가 정통 오페라로 귀족층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다면, ‘쾌활한 극장’은 배꼽 잡는 오페레타로 민초들의 고단한 일상을 달랬을 것이다. 1873년부터는 프랑스 희극 오페라의 대표자로 꼽히는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가 극장을 경영했다. 1902년 극장의 이름은 지금의 ‘개떼 리릭’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서커스 공연 등으로 명맥으로 잇던 극장은 1989년 어린이 전용 놀이시설 ‘매직 플래닛(Planète Magique)’으로 대변신을 꾀했다. 그러나 이듬해 폐관한 뒤 건물은 10년 넘게 방치됐다. 파리시는 2001년 이 건물을 놓고 프랑스에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비디오 아트, 일렉트릭 뮤직 등 신 개념의 예술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개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건물의 리모델링 설계자가 여성 건축가 마뉘엘 고트랑(Manuelle Gautrand)로 결정되고, 콘텐츠를 개발하고 운영할 팀도 꾸려졌다. 7천860만 유로(약 1천237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약 6년간의 공사 끝에 지난달 재개장했다.

디지털 아트의 처음과 끝

파리시가 보도자료에서 밝힌 ‘개떼 리릭’의 설립 목적은 ‘독립 예술가들의 작업을 장려하고, 이들의 창조활동이 현실에서 적용되도록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예술가들이란 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나 음악가를 뜻한다. 건물의 구조와 활용도를 살펴보면, 파리시가 설립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어떻게 고민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연면적 1만3천㎡(약 4천 평)에 지하 1층 지상 6층 구조의 ‘개떼 리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가장 높은 두 층에 마련된 예술가들의 아틀리에다. 공연과 전시를 보여주는 데서 끝나는 기존의 문화공간과의 차별점이기도 하다. ‘개떼 리릭’은 이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에 부합하고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예술가들을 초대해 아틀리에에 상주하면서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음악가들을 위한 연습실과 녹음실, 멀티미디어 아트 작업이 가능한 아틀리에 등이 있다. 최대 12팀의 개인 및 그룹이 작업 가능한 규모다.

이곳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마친 예술가들은 비디오 아트를 비롯한 각종 멀티미디어 작품들을 설치할 수 있는 1천㎡(약 300 평) 규모의 전시실, 130석 규모의 오디토리움, 최대 750명까지 수용 가능한 대형 공연장 등에서 전시 및 공연을 펼친다. 예술가들이 건물 안에 체류하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관객과의 만남이나 강연 등 행사도 수시로 열리는 장점이 있다. 디지털 아트 작품의 생산에서 소비까지 모두를 책임지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파리시는 이곳을 프랑스 유일의, 나아가 유럽 최대의 디지털 아트 전초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고 있다.

시민들에게도 여전히 쾌활한 곳

‘개떼 리릭’이 희극 오페라로 파리 시민들을 즐겁게 하던 19세기 극장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건물 로비를 지나 한 층을 오르면 대형 모니터 수 십 대가 눈에 띈다. 이 중 일부에서는 비디오 게임을 즐길 수 있고, 나머지에서는 ‘개떼 리릭’이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 아트 작품을 볼 수 있다. 비디오 게임의 경우 주제를 정해놓고 일정 기간 동안 5~6가지 비슷한 게임들을 선보인다.

예를 들어 개장 첫 주에는 ‘점프’를 주제로 수퍼 마리오, 소닉 더 헤지호그, 툼 라이더, 페르시아의 왕자 등 인기를 끌었던 아케이드 게임이 서비스됐다. 모니터 외의 공간에는 디지털 아트와 관련된 서적이 진열돼 있다. 주로 전문 서적이어서 전공 학생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이 높은 아마추어들이 다녀간다는 것이 근무자의 얘기다. 대출이 불가능한 점은 아쉽지만 대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모아놨다는 점에 위안 삼아야 할 듯. 디지털 아트, 디지털 디자인, 컴퓨터 프로그래밍, 비디오 게임 등을 주제로 한 전문잡지의 종류만도 130종에 달한다.

화려한 최첨단 시설 등에도 불구하고 더욱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탄탄한 하드웨어에 전혀 밀리지 않는 알찬 소프트웨어다. 개막 이후 5일 동안 유나이티드 비주얼 아티스트 그룹의 설치 전시, 무용수 듀오의 퍼포먼스 공연, 일렉트릭 음악과 아프리카 음악을 접목한 미국 그룹의 콘서트, 전통적 의미의 연극과 비디오 게임, 설문조사, 다큐멘터리 등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형식을 아우른 인터렉티브 연극 등이 줄줄이 열렸다. 수준 높은 강연이나 예술가의 아틀리에에서 진행되는 체험 행사들도 눈에 띈다. ‘개떼 리릭’의 행사표는 올해 연말까지 빈틈이 없다.

또 한 번의 변신, 무모한 도전 혹은 선견지명

계획 단계에서부터 치면 디지털 복합문화공간 ‘개떼 리릭’은 개장까지 만 10년 걸린 프로젝트다. 그만큼 파리시가 양적 질적으로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리모델링에만 1천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한해 예산은 900만 유로(약 141억 원)에 달한다. 어쩌면 1980년대 야심차게 문을 열었다가 얼마 안 가 폐장하고 말았던 ‘매직 플래닛’의 아픈 기억이 ‘개떼 리릭’에게 10년이라는 긴 준비기간을 만들어 준 것일지도 모른다.

‘개떼 리릭’과 ‘매직 플래닛’의 공통점이라면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프로젝트임에도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 밀어붙인 파리시의 결단이다. ‘개떼 리릭’이 오랜 기획 끝에 태어났지만, 홈페이지의 소개 글에 나타난 것처럼 음악, 영화, 만화영화, 연극, 무용, 비주얼 아트,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뮤지컬 영화, 건축, 컴퓨터 프로그래밍, 웹, 게임, 패션 등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장르와 디지털 문화를 연결시키고자 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이자 미지의 길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주얼 아트 분야에서는 유난히 뒤처져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 정부의 정치적 계산을 뒤로 하고, 이제 ‘개떼 리릭’이 19세기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아 ‘쾌활한 극장’으로 부활에 성공하느냐 여부는 이곳을 이용하게 될 파리 시민에게 달렸다. 개장 후 첫 장기 전시회가 열린 날 땅바닥에 눌러 앉아 빔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무한 단순반복 화면을 진지하게 감상하던 그 파리지앵들에게 말이다. 파리시가 내린 결단은 어쩌면 새로운 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이는, 또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달라고 조르는 시민들이 있어 가능했다.

북경 창작센터의 외관. 오픈스튜디오를 알리 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북경 창작센터 내부1층 작업공간

영하 20도 추위 달래준 빼갈 한 잔과 흑염소(?) 안주

환티에 이수청 입구
환티에의 철로

양 꼬지 구이를 하는 회족식당

레드아트 갤러리 전시 오픈과 제자들

7889 지역 WITH 갤러리에서의 성과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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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디자이너와 중국 소수민족 대표, 사또상과 함께 With갤러리전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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