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호재 _ 광주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최근 한국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권력의 부침은 문화복지에 관련된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영국의 문화정책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기금이 투여되는 각종 문화기관의 사업예산이 대폭 줄었다는 점이다. 런던, 버밍엄, 뉴카슬, 게이츠헤드 등 필자가 방문(6/27~7/2)한 도시들의 대부분 문화기관들이 정부의 예산감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청소년 혹은 시민대상의 문화예술교육이 영국 문화기관들의 핵심 사업으로 부상한데는 그러한 캐피탈 컨디션이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 교육에 투여되는 예산만은 비교적 정부의 예산감축 칼날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복지 정책은 통상 진보의 몫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을 지닌 영국의 우파 보수 정권도 문화예술교육에 관련된 예산에 있어서만은 관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전폭적인 관심이 21세기 선진 문화정책의 핵심 트랜드로 떠올랐음을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테이트 모던은 대영 박물관, 내셔널갤러리,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과 함께 영국 최고의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영국 정부의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템즈 강변에 있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 2000년 5월에 개관했다.
1980년까지 런던 중심부에 전력을 공급하던 발전소의 외관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에 미술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볼거리가 된 테이트 모던은 한 해 4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영국의 5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명성에 걸맞게 테이트 모던 컬렉션은 현대미술의 중심을 뉴욕에서 런던으로 옮겨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4가지 주제, 환경·오브제·몸·기억 등을 테마별로 전시하는 독특한 전시방식은 개관 초기부터 비평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컬렉션과 전시가 외부에 알려진 주요 기능이긴 하지만, 문화예술 교육 또한 테이트 모던의 핵심 콘텐츠를 이루고 있으며 최근에는 더욱 그 비중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테이트 모던 교육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커뮤니티 친화’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서의 명칭을 ‘Education part'에서 함께 배운다는 의미의 'Learnning part'로 이름을 바꿀 정도로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인근에 있는 3개 공립학교 예술 프로그램을 직접 지원하고 있으며, 미술관에서 직접 운영하는 창작 스튜디오, 패밀리 갤러리 등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다양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아이디어 스토어는 런던의 32개 자치구중의 하나인 타워햄릿츠(Tower Hamlets) 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도서관을 표방하고 있지만 800개가 넘는 평생 교육 프로그램, 휴식공간, 회의장소 제공, 탁아소, 재택방문 서비스, 카페, 자격증 취득 과정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개념 공공도서관이다. 특히 아이디어 스토어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아이디어 스토어가 어떠한 가치창출을 위해 구축된 공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주민수 25만명의 타워햄릿츠 구는 런던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한 자치구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까닭에 양극화도 심각해졌다. 이같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 자치정부는 ‘내부의 동력으로 내부를 치유하는 항체사회’, 이른바 ‘빅소사이어티 구축’을 구정의 핵심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자치정부 혁신에 관련된 수많은 상을 정부로부터 수상한 햄릿츠 구의 도서관 활성화 정책은 바로 그러한 항체사회 형성을 위한 백신의 역할을 목표로 추진된 셈이다.
아이디어 스토어의 도서관 정책은 ‘일상에서의 원활한 접근성’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위치부터 슈퍼마켓, 은행, 재래시장 등 일상의 거리공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치 누구나 쉽게 들락거릴 수 있는 서점처럼 꾸며진 게이트를 통해 도서관으로 진입한다. 도서관이라는 정적인 공간에 늘 있을법한 ‘핸드폰을 꺼주세요’ 라는 문구 하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아이디어 스토어의 이런 노력들은 결국 도서관 문턱 조차 밟아본 적이 없는 햄릿츠 구의 가난한 이민자들을 끌어들였고, 다양한 교육혜택을 통해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치유하는 문화복지의 요람으로 각광을 받게 된것이다.
버밍엄 랩이라고도 불리는 버밍엄 레퍼토리극장은 1913년 설립된 영국을 대표하는 유서깊은 극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많은 창작 및 외국 걸작들을 영국에 소개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배우, 무대 디자이너, 연출가를 배출해 낸 산실이기도 하다. 소규모의 창작극부터 뮤지컬까지 매년 평균 20여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기획한다.
버밍엄 레퍼토리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특히 사회적 이슈들을 강하게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늘 세계적 공연비평가들의 주요 얘깃거리로 떠오르곤 했다. 이같은 뚜렷한 정체성이 말해주듯 버밍엄 레퍼토리는 공연제작 뿐만 아니라 버밍엄시의 사회적 과제들을 연극이라는 장르적 역할을 통해 해소해가려는 노력이 유달리 돋보인다.
버밍엄시는 민족적·계층적으로 매우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존한다. 이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은 버밍엄 시 정부의 공동선과 같은 가치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고, 다문화적 접근을 통한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중요한 정책과제로 부상해 있는 상황이다. 그 배려는 매우 세심한 부분에까지 미쳐, 초등학교의 교명이 공식적으로 영어뿐만 아니라 몇 개의 다문화 언어와 함께 표기되고 있을 정도다.
버밍엄 레퍼토리는 그런 의미에서 바로 이 같은 시정부의 자치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아, 아동, 청소년, 노인 등 전 계층을 대상으로 예술을 매개로 한 ‘평생교육 시스템’은 버밍엄 레퍼토리 운영의 핵심 사업으로 정착돼있다. 지역학교와의 연계를 통한 방문교육프로그램, 극장시설을 활용한 예술교육 등 다양한 지역사회 공헌 프로그램 등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일주일 정도의 일정을 통해 영국의 3개 주요 문화센터의 운영 시스템을 현장에서 직접 눈여겨 보았다. 소개된 프로그램들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문화예술 교육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예산을 지원하는 정부와 문화교육이라는 영역에서 공감대를 이뤘다는 정치적인 동기가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문화정책의 하나의 중요한 전환기로 받아들여야 할 만큼 변화의 진폭이 커 보였다.
최근 들어 ‘지속가능한 성장’ 이라는 어휘가 곧잘 사용되곤 한다. 문화정책 또한 사회적 투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지속 성장이라는 어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정책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핵심 과제일 수밖에 없다. 또한 문화정책이 본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투자’ 라는 인문도시를 겨냥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기해보더라도 문화예술교육은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